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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적등(원)루(赤登院樓) |
|---|---|
| 분류 | 충북의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
| 시대/생몰년 | 1449년 |
| 형태 | 목조기와 |
| 언어 | |
| 지역 | 옥천 |
| 자료출처 | 충북의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금강가 산기슭에 있다.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 적등진 나루가 있고 여행객이 쉬어 가던 적등원에 있던 누각으로 금강의 적등나루를 왕래하던 많은 여행객들에게 요긴한 휴식처였다.
적등루에 올라 백옥같은 적등강(금강상류)의 드넓은 백사장과 강물 위를 오르내리는 물새 그리고 오가는 나룻배를 내려보는 조망이 무척 아름다워 많은 묵객들이 발길을 머물 고 사가정(四街亭)서거정(徐居亭)선생이 쓴 적등원루기가 전해온다.
이 기문에는 「옥천은 한양으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 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이 오가는 말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잇달아 군 동남쪽 3 0 리 쯤에 속읍이 있으니 이산(현 이원면)이란 곳에 큰 강이 있어 넓이가 수십리를 가로질렀으니 적 등이라 한다.
적등 강가에 원이 있고 누각이 있으니 참으로 큰 길거리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더위와 추울 때, 비바람 치는 날 여행중 고단할 때, 마소가 모자라거나, 도둑 염려가 있을 리 없고 적등원루에 올라 쉬고 구경하며 묵기도 한다.
건물이 퇴락하여 거의 없어질 지경에 정통 기사년(1449년, 세종 기년)화성(和城)최선 문(崔善門)신임 옥천군수가 이곳에 행차하여 누각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옥천고을 사람들 과 돈을 모으고 자신도 보태여 스님들이 노역으로 적등원 누각을 개축하기에 이르렀다.
이 당시 개축된 누각의 규모는 3칸이 크고 넓고 부엌이 달려 있어 머물며 잠잘만한 곳이 되며 전에 누추하고 좁고 퇴락하였던 것이 얼마나 우뚝 솟았는지 이리로 다니는 길손이 최군수의 덕을 찬양하였다.
적등원루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준(趙浚), 이직(李稷)김종직(金宗直), 정 이오(鄭以吾)등의 한시가 있으며 인근에 망선대(望仙臺)가 있었다 전해온다.
1)이직(李稷)-亨齊詩集 卷四
〔원문〕
제목: 적등루에오르다. (登赤登院樓 등적등원루)
往來行旅曰千千 강래행려일천친
爭渡江頭一雙船 쟁도강두일쌍선
更上赤登伋得句 경상적등루상망
白鷗閑泛鏡中天 백구한범경중천
〔번역문〕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척 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 있구나.
2)김종직(金 宗直)-佔畢齊集 詩集 卷十一
〔원문〕
赤登樓 和大虛 적등루 화대허
□□春江上 風吠亂碧漣 綠楊烟苒□ 黃犢독草芊錦 故國將寒食 貧居只博田 □門還在望 空泳白雲篇
3)조준(趙浚)-적등루(赤登樓)
【원문】
棲樓六月路三千
野渡無人獨上船
採芭出師誰得計
赤登樓下水如天
【번역문】
적등루에서 쉬어가는 6월달 삼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뉘라서 계교를 얻었는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4)정이오(鄭以吾)【원문】
自愧年來石二千
不如官渡濟入船
水禽尙壓前阿近
兩兩分飛割碧天
【번역문】
스스로 부끄럽네 이즈음의 군수노릇(石二千)
저 나루에 사람 건너는 배만도 못한 것이
물새들도 앞에서 꾸짖음이 가까움을 싫어하는 듯
쌍상이 날아 푸른 하늘을 쪼개네
[신증] 적등원 옆에 있다. ○ 서거정의 기문에, “옥천은 남쪽 지역의 집중지이다.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의 왕래하는 말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연이어 있다. 군의 동남쪽 30리쯤에 속읍이 있으니 이산(利山)이라 하고, 강이 있어 넓이 수십 리를 가로질렀으니 적등이라 한다. 그 위에 원이 있고 누각이 있으니 참으로 큰 길거리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큰 더위와 몹시 추울 때, 모진 바람과 비오는 괴로운 날에 길가는 행인들이 여기에 와서 머물게 되고, 혹은 물을 건너기 어려울 때나 길이 늦었을 때, 말과 소가 부족하거나 도둑의 염려가 있을 적에는 여기서 쉬기도 하고, 누에 올라 구경하기도 하고 하룻밤 유숙하기도 한다.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더울 적에는 서늘하게 해 주니, 사람들에게 덕을 줌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건물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헐어서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정통(正統) 기사년에 화성(和城) 최공이 군수로 온 뒤로는 잘 다스려지고 폐단이 사라졌는데, 어느 날 원의 행차[星駕]가 들에 나갔다가 적등루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장관으로서 어찌 차마 보기만 하고, 수습하지 아니하여, 길 다니는 행인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중수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방의 중 무착(無着)이 공의 뜻을 받들어 널리 고을 사람들에게 권허여 재물 약간을 얻었으며, 공도 사재를 내어 그 비용을 돕고, 온갖 실행은 모두 중들을 모아 부역하게 하여 농사짓는 이에게는 실끝만큼도 시끄러움이 미치지 아니하였다. 아무 해에 시작하여 아무 해에 준공하였다. 지은 누각 3칸이 크고 넓고 또한 부엌이 달려 있어 머물러 잠잘 만한 곳이 된다. 전에 누추하고 좁고 퇴락하였던 것이 이제는 얼마나 우뚝 솟았는가. 이 길로 다니는 행인들이 공의 덕을 찬양하여 마지 않는다. 내가 《주례(周禮)》를 살펴보니, 나라에 10리마다 여(盧)가 있고 30리마다 숙(宿)이 있었는데, 후세에 10리에 하나의 장정(長亭)이 있고, 5리에 하나의 단정(短亭)을 둔 것은 모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였다. 나라의 제도에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큰 길 30리에 한 전사(傳舍)를 두어 관리와 군졸을 시켜 맡아 보게 하였고, 장삿군과 여행자를 위하여서는 길의 멀고 가까움과 산천의 요해처를 보아서 적당히 원(院)을 두어, 백성을 모집하여 맡아보게 하고 토지를 주어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이는 상하와 공사의 구분은 있을 망정,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 하겠다. 이제 전사(傳舍)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있으니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나, 원에는 주관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가끔 집이 쓰러져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 어찌 임금께서 은혜를 베푸는 뜻이라 하겠는가. 이제 공이 정사를 하는데 이렇게 정성껏 힘썼으니,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분이라 하겠다. 아,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여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길을 통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옛 성현들도 이를 옳게 여길 것이다. 옥천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덕을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으므로 삼가 연월을 써서 돌려 보내노라. 공의 이름은 선문(善門)이요, 자는 아무개이며, 공의 뒤를 이어 군수로 온 이는 사군(使君) 정승조(鄭承韶)이니 또한 정치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 있구나.”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스스로 부끄럽네, 이즈음의 군수노릇[石二千] 저 나루에 사람 건너는 배만도 못한 것이. 물새들도 앞에서 호령함을 싫어하는 듯, 쌍쌍이 날아 푸른 하늘을 가르네.” 하였다.적등원 옆에 있다. ○ 서거정의 기문에, “옥천은 남쪽 지역의 집중지이다.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의 왕래하는 말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연이어 있다. 군의 동남쪽 30리쯤에 속읍이 있으니 이산(利山)이라 하고, 강이 있어 넓이 수십 리를 가로질렀으니 적등이라 한다. 그 위에 원이 있고 누각이 있으니 참으로 큰 길거리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큰 더위와 몹시 추울 때, 모진 바람과 비오는 괴로운 날에 길가는 행인들이 여기에 와서 머물게 되고, 혹은 물을 건너기 어려울 때나 길이 늦었을 때, 말과 소가 부족하거나 도둑의 염려가 있을 적에는 여기서 쉬기도 하고, 누에 올라 구경하기도 하고 하룻밤 유숙하기도 한다.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더울 적에는 서늘하게 해 주니, 사람들에게 덕을 줌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건물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헐어서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정통(正統) 기사년에 화성(和城) 최공이 군수로 온 뒤로는 잘 다스려지고 폐단이 사라졌는데, 어느 날 원의 행차[星駕]가 들에 나갔다가 적등루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장관으로서 어찌 차마 보기만 하고, 수습하지 아니하여, 길 다니는 행인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중수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방의 중 무착(無着)이 공의 뜻을 받들어 널리 고을 사람들에게 권허여 재물 약간을 얻었으며, 공도 사재를 내어 그 비용을 돕고, 온갖 실행은 모두 중들을 모아 부역하게 하여 농사짓는 이에게는 실끝만큼도 시끄러움이 미치지 아니하였다. 아무 해에 시작하여 아무 해에 준공하였다. 지은 누각 3칸이 크고 넓고 또한 부엌이 달려 있어 머물러 잠잘 만한 곳이 된다. 전에 누추하고 좁고 퇴락하였던 것이 이제는 얼마나 우뚝 솟았는가. 이 길로 다니는 행인들이 공의 덕을 찬양하여 마지 않는다. 내가 《주례(周禮)》를 살펴보니, 나라에 10리마다 여(盧)가 있고 30리마다 숙(宿)이 있었는데, 후세에 10리에 하나의 장정(長亭)이 있고, 5리에 하나의 단정(短亭)을 둔 것은 모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였다. 나라의 제도에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큰 길 30리에 한 전사(傳舍)를 두어 관리와 군졸을 시켜 맡아 보게 하였고, 장삿군과 여행자를 위하여서는 길의 멀고 가까움과 산천의 요해처를 보아서 적당히 원(院)을 두어, 백성을 모집하여 맡아보게 하고 토지를 주어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이는 상하와 공사의 구분은 있을 망정,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 하겠다. 이제 전사(傳舍)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있으니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나, 원에는 주관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가끔 집이 쓰러져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 어찌 임금께서 은혜를 베푸는 뜻이라 하겠는가. 이제 공이 정사를 하는데 이렇게 정성껏 힘썼으니,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분이라 하겠다. 아,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여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길을 통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옛 성현들도 이를 옳게 여길 것이다. 옥천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덕을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으므로 삼가 연월을 써서 돌려 보내노라. 공의 이름은 선문(善門)이요, 자는 아무개이며, 공의 뒤를 이어 군수로 온 이는 사군(使君) 정승조(鄭承韶)이니 또한 정치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 있구나.”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스스로 부끄럽네, 이즈음의 군수노릇[石二千] 저 나루에 사람 건너는 배만도 못한 것이. 물새들도 앞에서 호령함을 싫어하는 듯, 쌍쌍이 날아 푸른 하늘을 가르네.” 하였다.
[여지도서] 赤登樓(古有今無)
| 키워드 | 충북의 누정,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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