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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서정자(西亭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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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충북의 누정 |
시대/생몰년 | 1510년 |
형태 | |
언어 | |
지역 | 옥천 |
자료출처 | 충북의 누정 |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산 12시 서정자산 정상에 있었다고 한다.
이인(利仁)찰방 이던 안사전(安嗣全)공이 외가가 있는 옥천에 낙향하여 옥천읍 서정리 서화천이 휘돌아 가는 옥천군 옥천음 시정리 산 12-1 번지인 서정자산 정상에 조선중기인 1510년(중종 5년)에 세운 정자 이다.
언젠가 퇴락하여 정자터만 남아 있던 것을 서정자 복원을 위해 2009년 12월 중원문화 재연구소에서 시굴조사를 마치고 발굴조사를 거쳐 복원할 예정이다.
2이)9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정자터에서 고려와 조선시대 기와편이 많이 발굴되었고 주 춧돌로 추정되는 석재 등도 나와 목조와가 형식의 정자로 추정된다.
서정자란 정자 이름은 이 정자를 건립한 안사전공의 호인 서정(西亭)에서 붙혀졌다 하 며 마을 지명유래도 서정에서 연유하여 서정리라 부르게 되었다.
서정자는 경상도 서부-추풍령-영동 회동역-옥천 가화역-증약 찰방역에서 북이나 북서 방면으로 문의, 청주, 공주를 잇는 충청대로와 경상서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역길에 위치하 였고 동서로는 상주, 보은과 옥천청산방면에서 옥천 가화역을 거쳐 금산으로 통하는 지리 적으로 중요한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여행객의 좋은 쉼터였다
특히 임진.왜란 개전초기에 의병장 중봉 조헌(趙憲)선생 휘하의 핵심참모인 전승업 선생 을 비롯한 의병 참모들이 서정자에 모여 시국과 전략회의를 하였다는 기록이 정립(鄭翌)선생이 기록한 일기인 고암집에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유서가 깊은 정자 이다.
더욱이 의병장 중봉 조헌선생 시집에 “이가의(李可依)가 서정시(西亭詩)에 차운하여 보 이기에 느낌이 있어 차운함” 이란 한시가 「중봉집 1권」에 수록되어 더 의의를 깊게 한다.
또한 주변경관은 서화천 계곡이 구비 구비 휘돌아 가며 곳곳에 깊은 소(沼)와 아름다운 바위절벽이 펼쳐져 탁트인 절경을 이루고 있다.
한편 서정자 남쪽 기슭 큰 바위에서 낙향한 안사전공이 낚시로 소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어 안사전공 후손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워 안공의 송덕을 기리고 있다.
순흥안씨 후손 문중에서 산기슭에 재실인 영모제를 신축하여 선대조상을 기리고 있다.
시문
①李可依가 四亭시에 차운하여 보이기에 느낌이 있어 차운함 (중봉집 권1, 중봉시 택주)
【원문】
一李可依次 西亭韻見不 軒感而次之 耻學蘇秦夏衣구 晚來走奇仲宣樓 山容개闢隨方異 雲影參差수 水流 浮世低昂民物態 騷人憔/卒古今愁 皇王帝伯何殊轍 郭落乾坤白盡頭
【번역문】
-李可依가 西亭시에 차운하여 보이기에 느낌이 있어 차운함 소진이 여름에 갖옷 입음 배우기 부끄러워
늘그막에 한갓되이 仲宣樓에 기대섰다 산 모습 닫히고 열려 방향따라 다르고 구름 그림자 들쑥 날쑥 물을 따라 흐른다 부박한 세상 낮았다 높았다 백성들 사는 모습 시인은 古今의 근심으로 憔?悴하구나 皇帝 帝伯이 어지 수레길을 달리하리 탁트인 天地에 머리가 다 세누나
키워드 | 충북의 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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