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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越役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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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산수유기 |
시대/생몰년 | 1735년(영조 11) 4월 |
형태 | 필사본 |
언어 | 한문 |
지역 | 서울-양근-지평-횡 |
자료출처 | 西堂私載 권4 |
저자는 생전에 자신의 시문을 정리하고 自編해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저자의 遺集으로 현재 규장각에 전하는 필사본(12권 12책) 「西堂私載」(古3428-380)라는 이름에서 우선 그러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편차를 보아도 詩가 지은 순서대로 실려 있고, 神道碑銘과 墓碣銘의 경우 권5에는 1736년 전후까지 지은 것이 실려 있고 권6~7에는 1739년 이후 지은 것으로 구분되어 실려 있으니, 1737년 下鄕하여 이듬해 上京하기 전까지 정리된 것이 권5에, 나머지가 권6~7에 실린 것인 듯하다. 즉 文衡을 누차 역임하는 등 著述에 뛰어났던 저자는 65세를 전후한 시기에 자신의 시문을 정리, 자편해놓고 그 이후 지은 시문들도 이를 바탕으로 그때그때 모아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임종에 앞서 諡號나 墓道文을 청하지도 말고 遺稿를 간행하지도 말라고 유언하여 이후 100여 년이 지나도록 실제 묘도문도 유고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유언에 관계없이 문집이 간행되는 경우가 많으나 저자의 경우 아들 李山培도 일찍 죽고 퇴락하는 소론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실제 事蹟과 遺文을 정리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800년대 후반에 老年의 李裕元(1814~1888)은 公議를 따라 저자의 行狀을 지었는데, 여기에서 “지은 바 碑版과 誌銘이 10여 권이 되고 그 나머지 序, 記, 雜著 약간 권도 있는데, 간행되었다.” 하였다. 이 표현은 당시 李裕元의 주도로 遺稿의 간행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리 말한 것이지 실제 이전에 간행된 유고를 가리킨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간행본이 없기도 하거니와 실제 李裕元의 아들 李石榮의 印記가 찍힌 필사본 「西堂集」 12책이 현재 장서각(4-6119)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西堂集」은 간행을 위한 기초 단계의 작업 중에 중단된 형태로 남아 있다. 그 특징을 살펴보면, 우선 詩는 빠져 있고 文만 실려 있는데 「西堂私載」에 실리지 않은 글들을 새로 모아놓았고 일부 잘못 편차된 부분을 바로잡아 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괄 卷次를 매기지 않고 文體別로만 卷次를 달았으며 校訂의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내용을 보면, 冊1은 應製錄(敎書, 冊文, 咨文 등), 冊2~3은 神道碑銘, 冊4~5는 墓碣銘, 冊6~8은 墓誌銘, 冊9는 墓表, 諡狀, 行狀, 冊10은 哀詞, 祭文, 碑銘, 塔銘, 銘贊偈, 冊11은 書, 序, 冊12는 記, 題, 跋, 雜著이다. 이 가운데 冊1의 응제록과 冊8의 묘지명 18편, 冊10 전체는 새로 수습된 부분이고, 神道碑銘과 墓碣銘이 각기 합쳐졌고, 「西堂私載」 卷10 墓誌銘의 맨 끝에 실렸던 〈成均進士權君墓碣銘〉이 冊5의 묘갈명 맨 끝으로 옮겨 바로잡혔고, 「西堂私載」 卷4 記에 실렸던 〈紀崔判官事〉를 冊12에서는 빼버렸다. 한편 冊8의 墓誌銘에서 11편이 빠지고 새로 18편이 들어갔으며, 冊9의 行狀에서 李森과 趙泰億에 대한 것이 빠지고, 冊11의 序 2편, 冊12의 記 3편이 각기 줄었다. 이러한 편차도 곧 李裕元이 行狀에서 언급한 순서와 비슷하니, 곧 간행을 위한 편차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西堂集」의 필사 연도도 1800년대 후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古鮮冊譜」에는 徐有榘의 自然經室에서 淨寫된 14권 14책의 필사본이 언급되어 있는데, 현재 전하는 본이 없어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이 필사본이 「西堂集」과 유사한 것이었고 2책이 더 많은 것은 「西堂集」에서 빠진 詩 부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徐有榘의 생몰년(1764~1845)으로 볼 때 李裕元이 유고의 간행을 도모하기 이전에 서유구가 「西堂私載」를 바탕으로 저자의 유고를 정리, 편차해 놓았던 것이 아닐까 싶지만 추측에 그칠 뿐이다.
한편 규장각 소장의 「西堂私載」는 필사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데, 역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許曄의 「草堂集」(古3428-385), 許筬의 「岳麓集」(古3428-386), 申綽의 「石泉遺稿」(古3436-28) 등과 謄寫한 글씨체나 편차에 있어 總目錄을 앞에 실은 점 등에서 거의 흡사한 특징을 보인다. 곧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들에 의해 등사되었다는 결론인데, 아마도 일제 강점기 때 규장각 내의 전적 정리 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던 듯하다. 그렇다면 「西堂集」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보다 草稿의 형태에 가까운 「西堂私載」를 대본으로 한 점이 의문인데 당시의 史料採訪 사업이나 고전적 정리에 대해서는 더 깊이 있는 연구가 요구된다.
또한 저자가 지은 것으로 필사본의 「西堂釋褐錄」 2권 2책이 규장각(奎7657)에 소장되어 있는데, 1711년 菊製의 수석 때부터 졸하기 1년 전인 1743년까지의 行歷과 上疏, 批答 등을 적어 놓은 것이다. 위의 두 본에 없는 저자의 부록문자를 대신할 만하며 상소 내용도 실려 있어 참고가 된다.
본서의 저본은 등사 연대를 알 수 없는 필사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키워드 | 영춘, 단양, 청풍, 사군산수, 李德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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