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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追記東峽遊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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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산수유기 |
시대/생몰년 | 1728년(영조5) |
형태 | 활자본(芸閣印書體字) |
언어 | 한문 |
지역 | 연풍, 청풍, 단양 |
자료출처 | 東谿集 권2 |
저자는 少論의 名門 출신이나 趙顯命, 趙文命 등의 從祖兄들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진출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자주 병고에 시달리면서 性理學에서 벗어나 老莊과 佛敎에 심취하고 文章家로 자처하여 蘇軾의 意氣를 사모하였기 때문에 당시 文壇에서 이단시된 경향마저 있었다.
저자는 비교적 일찍 졸하였으나 생전에 자신의 저술을 정리한 적이 있었던 듯하다. 저자와 黃景源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자신의 글을 정리해 황경원에게 보여 주고 서문을 받고자 하였는데, 황경원은 문집의 서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정중히 거절하며 저자가 儒佛道 삼교의 합일을 주장하는 것도 황당하지만 사실은 불교에 편중되어 있다며 비판하는 내용이 나온다.(答趙翊衛書, 黃景源 撰, 江漢集 卷5) 황경원뿐만 아니라 李天輔와 南有容에게도 자신의 원고를 보여 주고 평을 부탁하였으나 역시 비슷한 이유로 거절당했는데(答趙錫汝, 南有容 撰, 雷淵集 卷15) 이때 자편한 원고의 규모나 내용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한편 1738년 남유용이 「東谿遺集」을 보고 차운하였다는 詠杜鵑詩는, 간행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생전에 자편한 원고를 보고 차운하였거나 저자의 유집을 수집, 편찬하는 도중에 아직 산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글을 보고 차운한 것인 듯하다.
저자의 사후 유문을 편찬하고 간행한 이는 從祖兄이자 知己인 趙顯命이다. 조현명의 年譜에 의하면, 1737년 堂弟인 東谿君이 졸할 때에 後嗣를 부탁하자 자신의 셋째 아들을 趙載履로 이름을 고쳐 양자로 삼아주고 傳을 짓고는 후에 재물을 내어 그 문집을 간행해 주었다고 한다.(趙顯命年譜, 歸鹿集 卷20) 저자 또한 자신의 畫像贊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이로 “벗으로는 德重(林像鼎)이 있고, 형으로는 稚晦(趙顯命)가 있다.”고 하였으며, 조현명도 세상 사람이 모두 그르다 할지라도 錫汝(趙龜命)의 한 마디면 족하다고 할 정도로 서로 신임하는 사이였다. 조현명은 저자의 문집을 간행할 때 一族 중 文才를 지니고서 요절한 趙啓命(1708~1737)의 「南谷遺稿」와 趙九鎭(1723~1737)의 「聽凉軒稿」를 附集하여 함께 간행하였는데 부집은 도합 14판 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다. 1741년에 趙裕壽(1663~1741)가 지은 발문에 의하면 동계의 문집을 바야흐로 인행하면서 이 글을 덧붙이니 원집에 더욱 광휘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南谷聽凉軒兩稿附錄跋, 趙裕壽 撰, 聽凉軒稿)
따라서 저자의 유집은 조현명이 수습, 편차하여 1741년 12권 6책을 인서체자로 간행하면서 「남곡유고」와 「청량헌고」를 부집해 함께 인행한 것이다.《초간본》 이 초간본에는 서발이 없으나 권말에 조현명이 지은 小傳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현재 규장각(古3428-307), 장서각(4-5924),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734) 등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752년에 黃景源이 慶州尹으로 부임하며 저자의 문집을 목판으로 복간하였다.《복간본》황경원이 쓴 묘지명에 의하면, 저자 사후 5년 만에 淸谿山에 올라 조문하고 그 후 12년 뒤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여(1751~1752) 문집을 복간하였다고 하면서 자신이 저자를 가장 잘 알고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이라고 문집 간행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목판본은 활자본인 초간본을 판하본으로 하여 복간하였기 때문에 편차나 구성이 모두 활자본과 똑같다. 단지 활자본에 잘못 놓였던 글자를 몇 개 바로 각인한 경우가 보이지만 교정 상태 등은 오자가 많이 보여 오히려 활자본만 못한 듯하다. 한편 「鏤板考」에서 당시 「東谿集」 12권의 판목이 경주부에 소장되어 있는데 재종제 趙啓命의 「南谷遺稿」와 삼종손 趙九鎭의 「聽凉軒稿」가 附集되어 있다고 하여 복간시에도 역시 두 문집을 함께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복간본은 규장각(奎4330, 4334, 5093),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후 1773년에는 영조가 저자의 문집 서문을 써서 내렸는데, 저자가 벼슬로는 현달하지 못하였으나 世弟 입학시에 將命生을 맡았었고, 또 탕평책을 주장한 점과 李天輔 등과 친하였다는 말을 듣고 서문을 써서 내린 것이다. 그 후 일부 간본에서는 영조의 어제 서문을 추각하여 합철하였다.
본서의 저본은 1741년에 인서체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古3428-307)이다. 다만, 부집된 趙啓命의 「南谷遺稿」와 趙九鎭의 「聽凉軒稿」는 총간의 편집 방침에 따라 수록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키워드 | 연풍, 청풍, 단양, 제천, 사군산수, 趙龜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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