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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淸峽日記
분류 산수유기
시대/생몰년 1722(경종2) 3월 15~4월 3일 사군 유람: 3월 21~25일
형태 목판본(木版本)
언어 한문
지역 서울-광주-여주-원
자료출처 月谷集 권9

저자는 老論 출신으로 숙종조 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 중 졸한 吳斗寅의 손자이고, 金昌協의 외손이자 權尙夏의 孫壻이며 陶菴 李縡의 문인이다. 뛰어난 文才로 일찍부터 부제학, 대사성, 문형 등에 등용되었지만 老論 峻論의 의리에 충실했던 저자는 英祖 초기의 蕩平 정국에 반대하여 사직과 출사를 반복하며 山水를 유람하는 일이 잦았다. 그 가운데 저자는 자신의 詩文을 자주 정리해두어 젊은 나이에 졸하였음에도 비교적 많은 유문을 남길 수 있었다. 먼저 저자가 1716년에 짓고 다시 1720년에 附記한 〈自題詩草後〉에서 17세 이전의 시 60여 수를 수록하였다고 하니 20세를 전후로 자신의 시문을 정리했던 듯하며, 30세경인 1729~1730년에 걸쳐 자신의 글을 또 정리하였는데 〈題詩稿後〉와 〈題童習續稿〉(文穆公遺稿 冊15) 및 작품의 後識 등에서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또 南有容이 1724년 〈題吳伯玉瑗遊鐘巖詩卷後〉와 1734년 본집 권5에 〈詩稿跋〉로 실려 있는 〈伯玉詩集跋〉을 써 주었으니, 이때에도 자신의 시를 모아 南有容에게 보여 주고 글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1737년에는 南有容, 李天輔 등과 함께 鐘巖에서 수창한 시를 모아 詩錄을 편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南有容과 李天輔가 각각 〈鐘巖詩卷跋〉과 〈題鐘巖酬唱錄後〉를 지어 그 사실을 기록하였으며 본집에는 〈又命韻同賦〉라는 제목으로 저자가 지은 20수가 기록되어 있다. 鐘巖은 부친인 海昌尉 吳泰周의 別墅가 있던 곳으로 전후로 文人들이 자주 詩會를 베풀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自編 詩稿 등을 바탕으로 저자가 졸한 후 아들 吳載純 등이 유문을 수집, 편차하여 1752년 14권 7책을 芸閣活字로 간행하였다.《초간본》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5854, 7031), 장서각(4-6359),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11),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집의 간행 경위는 序跋 등이 없어 단정할 수 없으나, 1762년에 南有容이 쓴 李天輔의 「晉菴集」 서문에서 “月谷의 文集은 이미 간행되었다.”고 하였으며, 저자의 묘지명에서도 “月谷集 약간 권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 묘지명은 아우 吳瓚(1707~1751)이 죽고 아들 吳載純이 洗馬였을 때 지은 것이므로 1753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집은 1753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필사본인 「文穆公遺稿」 年譜에 “壬申(1752)夏 文集成總七卷”이란 기사가 있어 본집이 1752년에 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文穆公遺稿」는 罫印淨寫本으로 총 15책이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D1-A2404)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의 詩文이 15책, 年譜 1책인데 제14책이 缺本이며, 책의 크기와 분량도 각기 다르다. 권1~15에는 저작 연도순으로 1800여 수의 詩가 실려 있고, 이후 책8부터는 文으로 卷次가 구분되어 있지 않고 책머리에 수록 문체명만 실려 있다. 책8은 序(21), 記(15)인데 記는 건물에 대한 기와 遊記로 나뉘어 각각 연도순으로 실려 있으며, 책9는 편지(55), 책10은 上疏(41), 책11은 箚子(6), 應製文(15), 經筵錄이고, 책12는 墓表(3), 墓誌(8), 行狀(4), 遺事(1), 諡狀(1)이다. 책13은 祭文(29), 告文(18), 哀辭(3), 책14는 缺冊이고, 책15는 題跋(26), 箴銘贊(7), 雜著(15)와 拾遺이다. 습유는 序跋과 雜著, 遊記, 應製文, 墓誌, 祭文, 편지 등 다양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간행본에 실린 작품이 많다. 연보는 ‘先府君年譜’라 하여 1790년 기사까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들 吳載純이 편차한 듯하다. 연보를 제외한 필사본은 문집의 형식이나 습유의 내용 등을 통해 볼 때, 저자의 사후 자편고를 바탕으로 유문을 수집하여 편찬한 것인 듯하다. 다만 제명이 「文穆公遺稿」인 점으로 보아 저자에게 諡號가 내려진 1793년 이후에 年譜를 포함해 재정리하여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1792년 저자의 아들 吳載純이 죽자 正祖가 그의 유고를 간행하라고 명하고 1793년 시호를 내렸는데 이즈음 吳載純의 문집인 「醇庵集」을 정리하면서 부친인 저자의 문집도 다시 정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서의 저본은 1752년에 운각활자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奎5854)이다. 卷尾에 저자의 종질 吳載弘의 문집인 「白雲遺稿」가 11판 정도 附集되어 있으나 부집은 영인대상에서 제외하였다.
키워드 사군산수, 吳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