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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양종대(梁鍾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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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782(정조 6)∼1860(철종 11)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성원(聲遠), 호는 금파(金波)이다.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이며, 고조는 양위원(梁渭源), 증조는 양이함(梁以涵), 할아버지는 양세복(梁世復), 아버지는 양흡(梁潝), 어머니는 함창김씨(咸昌金氏)로 김초보(金楚寶)의 딸이다. 회인의 금곡(金谷, 지금의 회남면 금곡리)에 살았다.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깊었으며, 온화하고 공손하였다. 부모를 모심에 뜻을 거스르지 않았으며, 혹 잘못이 없으면서도 회초리를 맞아도 또한 순종하였다. 상(喪)을 당하여는 지극히 슬퍼하며 3년간 예를 다하였으며, 제삿날에는 반드시 3일간 고기를 먹지 않고 사모하며 애통해 함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형제간 우애가 두터워 동생 양종원(梁鍾遠)이 종숙(從叔)의 양자로 가자 자기 집 근처로 이사 시켜 밤낮으로 함께 지냈으며, 막냇동생 양종래(梁鍾來)가 10년 동안 병으로 앓자 몸소 정성을 다하여 돌봤다고 한다.
자라면서 박학(博學)하고 글을 잘 지었으며, 일찍이 향시에는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향천(鄕薦)이 있었으나 끝내 포의로 지냈다. 그러나 학문적 성취가 있어 고을의 선비들이 존경하였고, 인근의 학생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모여들어 평생을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다. 1860년(철종 11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키워드 | 남원양씨, 성원, 금파, 회남면 금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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