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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박명신(朴命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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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학자 |
시대/생몰년 | 1777(정조 1)∼1875(철종 8) |
형태 | |
언어 | 한국어 |
지역 | 보은 |
자료출처 | 보은군지 |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본관은 영해(寧海), 처음 이름은 동신(東新), 자는 응인(應寅), 호는 옥산(玉山)이다. 서청(西靑) 박성혼의 큰아들이다.
10여 세에 이미 뛰어난 재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일찍이 관등시(觀燈詩)를 지었는데 주위에서 외워 전하니 현감 이가운(李可運)이 듣고 크게 놀라 찾아와 서로 화답하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한 향시(鄕試)에 응하였는데 청안(淸安)의 이름난 선비 황검(黃檢)이 그 글과 서법이 모두 뛰어난 것을 보고 사위로 삼았다. 집안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의를 행함과 효우(孝友) 돈독하였으며, 문장을 지을 때는 수천 언(言)을 쓰면서도 붓을 멈추지 않았고, 기억력이 뛰어나 한번 본 것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학행으로 여러 차례 벼슬에 추천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오직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만년에 고을 유림의 어른이 되어 항상 상석에 초대되었으며, 매번 나갈 때는 아들 박래영(朴來榮)이 백수(白首)로 뒤를 따르고 손자 박기일(朴基一)이 부축하고 증손 박봉호(朴鳳鎬)가 지팡이를 받들었는데 운(韻)을 불러 시을 지을 때면 4대가 연이어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1875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증손 박용호(朴龍鎬)가 수집하여 편집한 '옥산유고(玉山遺稿)'가 집안에 전한다고 한다.
키워드 | 영해박씨, 동신, 옥산, 옥산유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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