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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공직(龔直)
분류 무인
시대/생몰년 ?∼939(고려 태조 22)
형태
언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신라 말 고려 초의 매곡(昧谷 : 지금의 회인) 출신 무장이다. 어려서부터 용맹과 지략이 뛰어났으며 매곡성(眛谷城) 장군이 되었다. 신라 말의 혼란기에 처음에는 후백제의 견휜(甄萱)을 섬겨 그의 심복이 되어, 맏아들 직달(直達)과 둘째 아들 금서(金舒) 및 딸 하나를 견훤의 볼모로 완산주(完山州)에 보냈다. 그러나 후백제에 조공하기 위하여 완산주로 갔을 때 견훤의 무도함을 보고 마음을 돌려 고려 왕건에게 스스로 가서 복종하였다. 당시 그는 그의 뜻을 볼모로 있던 아들 직달에게 전달하였고, 직달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하여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사(高麗史)"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직달에게 말하기를 “이제 이 나라를 보니 사치하고 무도(無道)하구나. 내 비록 왕과 가까우나 다시 오고 싶지 않다. 들으니 고려의 왕건의 문덕(文德)은 백성들을 안정시킬 만하고 무덕(武德)은 충분히 포악한 자를 제압할 만하므로 사방에서 다들 위엄을 두려워하고 그 덕을 사모한다고 하는구나. 내가 그에게로 귀부하고자 하는데 너의 뜻은 어떠하냐?”라고 하였다. 이에 직달이 “볼모로 들어 온 이래 이 나라의 풍속을 살펴보니, 부강한 것만 믿고서 교만하고 뽐내는 일만 힘써 다툴 뿐이니 어찌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버님께서 현명한 군주에게 귀부하시어 우리 고을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고자 하시니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마땅히 동생과 누이와 함께 틈을 타서 귀부할 것입니다. 비록 귀부하지 못할지라도 아버지의 현명한 결단에 힘입어 남은 경사가 자손까지 이어진다면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염려하지 마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매곡으로 돌아와 932년(태조 15)에 아들 영서(英舒)와 같이 고려에 가서 스스로 복종하였다. 태조는 크게 기뻐하며 대상(大相)으로 임명하고, 백성군(白成郡, 지금의 경기도 안성)을 녹읍으로 주었으며, 말 세 필과 채색 비단을 내렸다고 한다. 또한 아들 함서(咸舒)를 좌윤(左尹)으로 삼고, 왕실의 친족인 정조(正朝) 준행(俊行)의 딸을 영서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이에 공직은 태조 왕건에게 매곡현과 접해 있는 후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 지금의 청주시 문의면 일대) 공략을 건의하였다. 공직이 태조에게 복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견훤은 크게 분노하여, 볼모로 있던 공직의 아들 직달과 금서 및 딸을 잡아 가두고 다리의 힘줄을 단근질하여 직달은 죽었다. 939년(태조 22)에 공직이 좌승(左丞)을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니 태조는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정광(正匡)으로 추중하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고 하였다. 이후 함서를 후사로 삼고, 뒤에 다시 사공(司空)․삼중대광三重大匡을 추증하였다.

키워드 공직, 회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