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보기

명칭 김상진(金相進)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736(영조 12)∼1811(순조 11)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은 금릉(金陵), 자는 사달(士達), 호는 탁계(濯溪)이다. 할아버지는 김세옥(金世鈺), 아버지는 김덕사(金德泗)이고 어머니는 선산곽씨(善山郭氏)로 곽세규(郭世圭)의 딸이다. 보은읍 어암리에서 출생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홍명원(洪命元)에게 수학하다가 성장하여서는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을 사사하였다. 부인은 풍천임씨로 임한성(任漢星)의 딸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른들로부터 교훈을 받으면 잊지 않고 실천하였다. 본래 몸이 허약하여 부모가 건강을 해칠까 걱정하여 조기입학(早期入學)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학문에 열중하였다고 한다. 13세 때 신와(愼窩) 홍명원(洪命元)에게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남보다 일찍 나아가고 늦게 물러나며 짧은 시간도 아껴 배워 학문이 크게 정진하였다.

1755년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758년 모친상을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모셨는데 무더운 더위에도 상복을 벗지 않았다. 1760년(영조 36)에 역천 송명흠에게 편지를 써서 제자의 예를 청하고, 이해 부친상을 당하여 모친상과 마찬가지로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1764년(영조 40)에 미호 김원행이 부모 봉양을 위해 보은에 오자 찾아가 제자가 될 것을 청하여 그로부터 성리학의 깊은 뜻을 배웠다. 1766년(영조 42) 6월에 당화(黨禍)로 벼슬에서 물러나 용유동(龍遊洞)에 물러나 있던 송명흠에게 나아가 '소학', '대학', '근사록(近思錄)' 등을 질정하고, 가을에 석실(石室)로 김원행을 찾아가 모시었다. 1767년에는 향해(鄕解)에서 수석을 하였으나 그 뒤 과거 때마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단념하고 고향에 은거하여 독서와 학문을 연마하면서 동문인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1722∼1791)과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1728∼1897)ㆍ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9∼1852) 등과 교우하였다.

1779년(정조 3)에는 학행(學行)으로 도백(道伯)의 추천을 받아 조경묘(肇慶廟) 참봉에 제수되어 부임하여 1780년 임기가 만료되어 귀향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로 고향에 돌아와 문을 걸어 자취를 감추고 자연을 벗 삼아 노니며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1791년 (정조 15)에는 땅을 구입하여 ‘의전택(義田宅)’을 마련해 치가(治家)에 힘을 쏟았다. 또한 천여 권의 책을 모아 ‘묵장각(墨莊閣)’이라는 서각을 만들고, 「문약(門約)」과 「종맹(宗盟)」, 「가숙절목(家塾節目)」 등을 만들어 문중의 자질(子姪)과 후학을 가르쳤다.

1811년(순조 11)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가하면 좋아 하는 술을 마시고 혹 취할 때는 공명(孔明)의 출사표(出師表)와 장중승전(張中丞傳)을 낭송하면서 애절한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감상적인 인간미를 보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매사에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릴 때는 한칼로 베듯 결단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성리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스승의 학설만 따를 뿐 새로운 주장을 세우지 아니 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는 주리(主理)ㆍ주기설(主氣說)을 절충하여 논하고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하여는 동론(同論)을 지지하였다. 스승인 역천은 임종 시 그를 평하여 “정결(精潔)하고 순수(純粹)한 사람이다.”라고 했고 미호 김원행은 “그 아는 바를 모두 실천하는 사람이다.”라 했으며 문우(文友)인 성담은 “규모와 심법이 누구보다 엄밀하니 학문의 깊이를 알 만하다.”라고 평하였다.

저서로는 '탁계집(濯溪集)' 10권 5책이 있으며, 1869년(고종 6) 보은 유림들이 덕을 추모하여 향리인 보은읍 어암리 탁동에 ‘탁청사(濯淸祠)’를 건립하고 역천 송명흠과 미호 김원행과 함께 제향 되었다. 탁청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훼철되어 남아있지 않다. 1761년경에 ‘독매원(獨梅園)’에 그가 손수 심었다는 백송(白松)이 천연기념물 제 104호로 지정되어 그 아름다움을 자랑해 왔으나 2004년경 주위 환경조성사업의 잘못으로 고사(枯死)하여 천연기념물에서 해제되었다. 묘소는 보은읍 어암 2리의 탁골에 있다.

키워드 금릉김씨, 탁계, 홍명원, 송명흠, 묵장각, 탁계집, 탁청사, 독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