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칭 | 신채호(申采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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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독립운동가 |
시대/생몰년 | 1880~1936 |
형태 | |
언어 | |
지역 | 청주 |
자료출처 | 충북바로알기 |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 시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 언론인이다.
신채호는 호가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고,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이며, 가명은 유맹원(劉孟源)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신숙주(申叔舟)의 18세손이다.
신채호는 충청도 회덕현 산내면 어남리 도리미(현 대전광역시 중구 어남동)에서 아버지 신광식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둘째 아들로 1880년 11월 7일 출생하였다. 도리미는 할아버지 신성우의 처가 마을이다. 신채호가 7세 되던 188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아버지 신성우는 가족들을 거느리고 1887년 자신의 고향인 충북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고드미로 돌아왔다. 신채호는 성장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신성우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다.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손자의 총명함을 알아본 신성우는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석헌 신승구와 신백우의 아버지 구당 신병휴에게 단재를 맡겨 가르쳤으며, 단재가 18세 되던 해에는 평산 임헌회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에게 단재를 소개하여 단재가 신기선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하고,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단재는 성균관 입학 후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으며,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변영만(卞榮晩)·이장식(李章植)·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들은 수업이 없는 오후에 종로 서점가를 돌며 근대 지식을 섭렵하면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였는데, 이 무렵 신채호는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자강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청원군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고, 25세 때에는 신규식·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하여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서호문답(西湖問答)>, <영웅과 세계>, <학생계의 특색>,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단군·부여·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반영된 <독사신론(讀史新論)>과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희망했던 영웅사관(英雄史觀)이 반영된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天喜堂詩話)> 등을 연재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家庭雜誌)』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이 중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되어 최남선(崔南善)이 발행하던, 『소년(少年)』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갑(李甲)·이승훈(李昇薰)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尹致昊)·안창호·최광옥(崔光玉)·최남선·박중화(朴重華)·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권업회(勸業會)에서 기관지인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文一平)·박은식(朴殷植)·정인보(鄭寅普)·조소앙(趙素昻) 등과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에는 윤세용(尹世茸)·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東昌學校)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고구려·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신채호는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자신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중편소설 『꿈하늘(夢天)』을 집필하였고,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漢城政府)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新大韓)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정한경(鄭翰景)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으로 불리는 의열단 선언을 집필하여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 등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고,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평등·폭력·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드러내었다. 신채호는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이필현과 함께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대만에서 외국위체를 위조 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는 직접 행동에 나섰으나 1928년 5월 8일 그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되고,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뇌일혈로 옥사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 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그의 역사학은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였으며,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나타나고,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여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키워드 | 신채호, 독립운동가, 역사가, 언론인,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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