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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박흠(朴欽)
분류 문인
시대/생몰년 1719(숙종 45)∼1772(영조 48)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 문장가로 본관은 영해(寧海), 자 사앙(士仰)이다. 회인 입향조 박효원(朴孝元)의 5세손이며, 증조는 박이주(朴二柱), 할아버지는 통덕랑 박문석(朴文碩), 아버지는 박창서(朴昌瑞), 어머니는 은진송씨로 송덕조(宋德祚)의 딸이다. 부인은 곡산연씨(谷山延氏)로 연준언(延俊彦)의 딸이다. 그의 집안 영해박씨는 대대로 학문과 효우(孝友)를 집안에 전하고, 덕을 숨기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웠고,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으며, 부모를 섬김에는 지극히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우택정, 양달해 등과 교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회남면 신곡리에 있었던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한 흥인사(興仁祠) 창건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누대에 걸쳐 재물을 흩어 남에게 베풀어 가계(家計)가 점점 기울자 독서를 하면서도 손수 호미질과 밭을 갈며 오직 근검절약하여 회복하였다. 1755년(영조 31), 1756년 거듭된 가뭄에는 회인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흩어질 처지에 놓여 나라에서 특별히 어사를 보내 구휼하였는데 이때 곡식을 내놓아 친척과 이웃을 도왔다. 이에 어사가 크게 칭찬하고 장계를 올려 벼슬을 추천하고 만나려 하자 끝내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생을 포의(布衣)로 회인면 눌곡리에서 살다가 1722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마을의 동남쪽 운산(雲山)에 장례를 치렀다.

키워드 영해박씨, 사앙, 흥인사, 회인면 눌곡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