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보기

명칭 조선지도첩(朝鮮地圖帖) 충청도(忠淸道)
분류 고지도
시대/생몰년 18세기 후반 이후
형태 목판본
언어 한문
지역 충청북도
자료출처 청주의 고지도

<조선지도첩>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판본 지도첩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본 지도는 <조선지도첩>에 수록되어 있는, ‘충청도’를 그린 목판본 도별도이다. 이 지도는 전체적인 구도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수록된 충청도 지도와 거의 동일하다. 물론, 세로로 긴 직사각형으로 표시된 찰방역(察訪驛)과 진보(鎭堡)가 추가되어 있고, 수록된 산의 명칭 중 다른 것이 많으며, 군현에 파견된 지방관의 지위(왼쪽)와 서울로부터 걸리는 시간(오른쪽)이 적혀 있는 점 등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이기봉). 아울러 지도 아래쪽에 주기가 달려 있는 점도 큰 차이점이다.
이 지도의 주기는 색다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특히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어 주목된다. 주기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영조 4년(1728)에 발생한 이인좌의 난 때 전사한 남연년(南延年)과 이봉상(李鳳祥)에 관한 기록, 영조 56년(1776) ‘이산(尼山)’에서 개명된 ‘이성(尼城)’이라는 지명의 등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통해 본 지도의 제작 연대를 18세기 후반 이후로 추정하는 것이다.
이 지도에서는 군현을 둥근 원으로 표시하고, 그 원 안에 목(牧), 군(守), 감(監)의 지방관의 직위 및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일수(日數)를 기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방관의 직위와 한양과의 거리 일수를 기재하는 방식은 같은 도별도인 <조선지도>, <동국팔역도>에서도 확인된다.

<주기내용>

俗離之雲莊臺 保寧之永保亭 淸州之華陽洞 俱以絶勝 稱山水秀麗 土地膏沃 士大夫多居之 黃澗接金山 恩津接礪山 稷山接振威 堤川(接寧越)
속리의 운장대, 보령의 영보정, 청주의 화양동 모두 절승(絶勝)으로 산수가 수려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사대부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황간은 금산에 접해 있고, 은진은 여산에 접해 있으며, 직산은 진위에 접해 있다. 제천(은 영월에 접해 있다.)
察謗 五 栗峰(淸州) 連源(忠州) 成歡(天安) 利仁(公州) 金井(靑陽)
찰방은 다섯 곳으로, 율봉(청주), 연원(충주), 성환(천안), 이인(공주), 금정(청양)이다.
鎭 四 所斤(泰安) 馬梁(庇仁) 安興(泰安) 平山(瑞山)
진은 네 곳으로, 소근(태안), 마량(비인), 안흥(태안), 평산(서산)이다.

堡三唐津 今革 舒川 波知島 舊革
보는 세 곳으로, 당진은 이제 혁파되었고, 서천이 있고, 파지도는 예전에 혁파되었다.
山城 安興(泰安) 双城(公州) 上黨(淸州)
산성은 안흥(태안), 쌍성(공주), 상당(청주)이다.
居民 二十一万九千七百六十八戶
거민이 219,768호이다.
田 二十五万五千二百八結
밭이 255,208결이다.
水營 大猛船 十四隻 龜船 二隻 防船 二隻
수영에는 대맹선 14척, 귀선 2척, 방선 2척이 있다.

扶餘百濟始祖溫祚所都 初都慰禮城卽稷山 後徙沺[泗]泚[沘]卽扶餘 傳[國]三十世 至義慈王 荒淫無度 唐高宗遣蘇定方 與新羅兵 攻滅之 佐平成忠諫死 至今大王浦 卽白馬江 岩石名爲落花岩 宮人臨亂 投死處也 洪州魯隱洞 有成三問舊居 韓山牧隱稼亭所居 永春丹陽淸風堤川 在大小白之間 山水絶勝 人稱福地 丹之龜島潭尤奇 溫陽有溫泉 自麗朝作井欄 我顯肅二聖 皆幸焉 有行宮 淸州新羅時娘臂 戊申賊入 格營將南延年 披斫罵不屈死 兵使李鳳祥亦不屈死 並立祠奉之
부여는 백제 시조 온조가 도읍을 정한 곳이다. 처음에는 위례성 곧 직산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사비 곧 부여로 옮겼다. 나라를 전한 지 30세 의자왕에 이르러 황음무도하였다.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보내어 신라와 함께 공격하여 멸하였다. 좌평 성충이 간언하다 죽었다. 지금의 대왕포는 곧 백마강으로, 암석의 이름이 낙화암인데 궁인들이 난리를 당하자 몸을 던져 죽은 곳이다.
홍주의 노은동에 성삼문의 옛 거처가 있다.
한산은 목은 이색과 가정 이곡이 살던 곳이다.
영춘, 단양, 청풍, 제천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는데, 산수의 풍경이 뛰어나 사람들이 복지라고 한다.
단양의 귀담과 도담은 더욱 뛰어나다.
온양에는 온천이 있어 고려 때부터 우물 난간을 만들었고, 현종과 숙종 두 임금이 모두 행차하였으며 행궁이 있다.
청주는 신라 시대에 낭비였다. 무신년 역적 이인좌 무리가 침입하니 영장 남연년은 칼에 베이고서도 꾸짖다가 굴하지 않고 죽었고, 병사 이봉상 또한 굴하지 않고 죽었다. 사당을 세워 함께 모셨다.

출전 : <청주의 고지도>(연구편),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2010. 26-27쪽

키워드 충북, 충청도, 청주, 조선지도첩, 청주, 영춘, 단양, 청풍, 제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