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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양달해(梁達海)
분류 학자
시대/생몰년 1702(숙종 28)∼1781(정조 5)
형태
언어 한국어
지역 보은
자료출처 보은군지

조선 후기의 학자․효자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호연(浩然), 호는 치재(嗤齋)이다. 보은군 가습(可習)에서 회남면 남대문리로 옮겨온 양경(梁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양효안(梁孝顔), 아버지는 율담(律潭) 양필도(梁苾道), 어머니는 단양우씨로 우하길(禹夏吉)의 딸이다. 양통해(梁通海)의 형이며, 회남면 판장리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진주(金震柱)의 딸이다. 수암 권상하의 문인이며 인산(仁山, 회인) 6처사의 1명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남달라 맛있는 음식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가져다드려 고을에서 효동(孝童)으로 이름이 났다. 부모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으로 연명하며 시묘하였으며 모친상을 당하였을 때는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같이 시묘하였다고 한다.

나이 18세에 황강에 있던 권상하를 찾아갔을 때 권상하가 시부(詩賦)로 그의 재주를 시험하고 나서 “그대는 참으로 하늘이 낸 학자로다.”라고 칭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찾아가자 자신이 이미 늙고 병이 들어 가르칠 수 없다며 그 문인 평실재(平實齋) 어유성(魚有成)을 소개하여 학업을 마치게 하였다. 이곳에서 운평(雲坪) 송능상(宋能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역천(櫟泉) 송명흠(宋明欽),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대성하였다. 송환기는 그를 가리켜 “회인의 양달해는 공자의 제자 안자와 같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의 부인 안동김씨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905년 조봉대부 동몽교관에 증직되고 부인 김씨와 함께 명정되어 정려문이 회남면 신곡리에 세워졌다. 정려문은 대청댐 수몰로 남대문리로 옮겨졌다.

키워드 남원양씨, 치재, 회남면 판장리, 어유성, 남대문리 정려문